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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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04-2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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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진상조사보고서 1950-06-25행방불명된 사람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예비검속되어 처형됐다.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됐다.
8월 17일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1120명.
25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는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들을 집단 학살했다.
그와 동시에 국민보도연맹원들을예비검속해 10만여 명을 학살했다.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 보도연맹원들을 제외하고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말이다.
증언에 의하면 전쟁 초기 경찰은 보도연맹원 등을 갯벌로 끌고 가 살해했다.
북한군에게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예비검속후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이다.
뒤이어 인민군이 점령하자 우강면 창리에서 좌익에 의한 우익 인사 보복 학살이 벌어졌다.
당하거나 형량을 선고받고 오랜 기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른바 '4·3 수형인'이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이를 미리 체포하는 일)이란 미명아래 좌익으로 분류된 사람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씨가 딸과 함께 단상에 올랐습니다.
김 씨는 얘기만 들었던 할아버지를 올해 초 다시 만났습니다.
김 씨의 할아버지는 1950년 7월예비검속을 당한 뒤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유가족 채혈을 통해 2007년 발굴했던 이름 모를 유해가 할아버지임을 확인.
28살)는 4·3 무장봉기 직전인 1948년 3월14일 모슬포지서에서 고문치사 당했다.
양씨의 사촌 형제 17명 가운데 4·3과 한국전쟁 시기예비검속을 거치면서 11명이나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됐다.
1955~1957년까지 쓴 일기를 묶은 표지.
확인돼 가족 품으로 돌아간 고 김희숙 씨와 유족의 사연이 소개됐습니다.
유족들은 김희숙 씨가 29세였던 1950년 한국전쟁 전후예비검속돼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것으로 알고 지냈습니다.
4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헤어진 아들 김광익 씨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제주공항 활주로 제주공항 활주로는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적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미리 검거하는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양민들의 학살터였다.
2007년부터 2009년에 걸쳐서는 제주국제공항에서 388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있고, 희생자 숫자가 달라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백조일손 역사관에서 근무하는 강태석씨가 방문객들에게 섯알오름예비검속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원을 확인한 고 김희숙 희생자 가족의 사연이 소개됐다.
고 김희숙씨(당시 29세)는 저지리 출신으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예비검속돼 섯알오름에서 희생당했다.
이후 김씨의 유골은 2007년 제주공항서 발굴됐다.
하지만 오랜 기간 신원은 밝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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